Chun Yun Jung

 

 

Statements

Reviews

전윤정이 거쳐 온 지난 몇 년간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오늘날 예술가가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는 학업을 마친 직후 레지던시 생활을 시작했다. 임시거주 방식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작업실과 생활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작가에게 안정적인 작업공간을 확보하게 해준다. 게다가 잘 돌아가는 프로모션 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가의 자기확장을 위한 최상의 기회일 수 있다. 기실 국내외의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다른 예술가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방법으로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 일종의 등용문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레지던시는 예술가가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 속의 예술가로 자리잡는 데 일종의 장애로 작용할 위험성도 있다. 레지던시에서의 만남이라는 것이 예술가 혹은 예술에 관심있는 소수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한정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예술가들은 그들만의 네트워크와 관계맺음에 갇혀서 세상을 넓게 볼 가능성을 차단당하기도 한다. 물론 레지던시의 가능성과 위험성은 작가 자신들의 개별적인 활동방식에 따라 사뭇 다른 과정과 결과를 도출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전윤정에 대한 이 글을 ‘예술가의 세계와 그 안팎의 문제’에 관해 몇 가지 언급하는 장으로 삼으려고 한다.

 

지난 수년간 몇 군데 레지던시에 참여한 후 지금은 고향 대전에 돌아와서 새로운 실험을 준비하고 있는 전윤정의 경우 가능성과 위험성은 반반 정도 작용한 것 같다. 우선 레지던시가 그에게 준 위험성과 그것을 극복해나간 과정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술계는 물론 사회  생활의 경험이 많지 않았던 전윤정은 지난 몇 년간의 레지던시 생활을 거치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한 지붕 아래서 작업과 생활을 병행해야하는 공간구조 때문에 작업뿐만 아니라 일상의 문제까지 함께 문제시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조바심내고 마음을 닫을 때도 있었지만, 주변의 동료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익혀나가면서 미술을 익히고 세상을 배웠다.

 

긍정적인 가능성은 다른 작가들과의 공동생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재발견한 것에 있다. 특히 그가 마지막으로 생활했던 인천아트플랫폼은 인천의 원도심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라 작업공간 인근에서 여러 시민과 관광객을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는 한적한 시골의 고즈넉한 작업실에서 관광객으로 가득한 원도심 공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레지던시 환경을 체험했다. 국내외 작가들과의 네트워킹은 물론 레지던시 주변환경과의 다양한 관계맺음은 그가 지낸 온 지난 몇 년 동안의 커다란 성과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레지던시 체험은 그가 보다 크고 넓은 세상과 대면하면서 예술가로서 활동하는 데 있어 매우 소중한 근거를 제공했다.

 

레지던시의 작가 전윤정은 지난 몇 년간의 미술계 생활에서 자신의 작업을 레지던시에서 획득한 문제의식, 즉 일상적인 생활공간과 전문적인 작업공간이 겹쳐진 곳에서의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에 포커싱하기 시작했다. 레지던시라는 좁은 세계이지만 그는 이 공간 속에서의 관계맺음을 사회 속 개인의 관계 문제로 의제화 했다. 그는 상처와 화합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아를 키워나갔다. 결국 예술가들에게 예술은 현실을 대면하는 통로로서의 별다른 세계가 아니라 예술 그 자체가 자신의 삶을 구축하는 현실 그 자체일 수 있다는 점을 전윤정의 삶과 작업에서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전윤정에게 있어 작업은 세상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매우 구체적인 현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윤정의 작업은 자이치유의 과정이자 그 결과이기도 하다.

 

전윤정은 깨알같은 글씨에 꼬물락거리는 필치로 드로잉을 해오고 있다. 그리 크지 않은 종이에 가는 펜으로 그려내는 그의 드로잉에는 초현실적인 이야기들이 가득 차있다. 그는 인체를 해체해서 뒤죽박죽 조립해놓은 것만 같은 형상들을 뭉텅이로 그려넣는다. 그것은 얼핏 봐서는 엽기 코드의 몸 담론을 담은 것 같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금 다르다. 전윤정의 드로잉에 등장하는 인체들은 인간과 인간 상호간의 관계맺음을 고민하면서 그 길을 찾아온 지난 몇 년간의 작가 자신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탐문하고 자신과 타자의 관계맺음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답변한다.

 

꼼꼼하고 집요한 작업 스타일은 벽드로잉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벽에 라인테이프를 붙여 빈공간에 선과 면을 창출하는 벽드로잉 작업을 해왔다. 애초에는 전시장 벽면에 공간 드로잉을 하던 그는 최근 들어서 캔버스에도 라인테이프 드로잉을 하고 있다. 무수히 반복되는 검은 선의 축적은 펜이나 붓으로 그려내는 선들에 비해서 훨씬 더 즉물적으로 예술가의 수행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라인테이프드로잉의 양상은 종이 위의 펜 드로잉과는 사뭇 다르다. 펜이 작가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재현하거나 표현하는데 유용한 방법이라면 라인테이프는 주로 직선을 이용한 선과 면의 창출을 결과하기 때문이다.

 

펜드로잉을 할 때의 전윤정과 라인테이프드로잉을 할 때의 전윤정에게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같이 나타난다. 두 작업의 공통점은 당연히 예의 그 꼼꼼함과 집요함이다. 그에게는 여느 작가들에게서 나타나는 반복의 미학을 훨씬 능가하는 섬세한 그리기의 마력이 있다. 그러나 펜과 라인테이프 두 가지 다른 드로잉은 각각 다른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펜드로잉이 소설적인 나레이션으로 자신의 일상과 체험을 그려낸다면, 라인테이프드로잉은 시적 언어로 공간을 유영하는 선과 면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사뭇 다른 양상이 한 작가에게서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전윤정의 경우 색의 규정을 배제한 단색의 세계를 통해서 서사와 공간을 구축해 나간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전윤정의 예술세계에는 예술과 사회, 예술가와 일반인, 전문적으로 제도화한 예술공간과 일상이 녹아있는 삶의 공간 사이의 이분법적인 대립이나 거리두기, 또는 양자의 조화 등의 요소들이 부재하다. 다시 말해서 아직 그의 작업에는 예술 세계 바깥과의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만남이 개입해 있지 않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작업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과 닿아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그가 살면서 만난 세계는 앞으로 그가 대면하고 구축해 나갈 새로운 세계가 결국은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동일율의 틀 안에 놓여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는 성찰의 예술가로서 자신의 안팎을 진지하게 들여다 볼 것이다. 전윤정처럼 꼼꼼하고 집요하게 자신의 삶과 예술을 들여다보는 예술가가 훨씬 더 치열하게 개인과 사회, 인간과 자연, 개체와 군집의 관계를 예술적 소통의 선상에 띄워 올릴 수 있지 않겠는가.


흰 바탕에 검은 선들이 얹혀있는 전윤정의 작품은 종이 위에 펜으로 끄적거린 것 같은 드로잉의 자연스러움과 솔직함에 기대는 듯하다. 그러나 펜에서 라인테이프로 ‘필기구’를 옮긴 이후 유기체의 분비물 같은 자연발생성은 사라졌다. 붓과 필력으로부터 벗어난 이러한 작품들을 작가는 ‘불편한 드로잉’이라고 말한다. 분절된 선과 선의 관계는 타인들 및 사회와의 불편한 물리적 심리적 관계를 하나하나 집적시킨다. 쌓이는 것과 그리는 것은 다르다. 잘라서 덧씌우는 꼴라주 방식은 환영에 호소하는 재현의 체계와 다르다. 그것은 인간적인 희로애락의 표현이 아니라, 감정의 쌓임, 응어리, 맺힘, 그리고 풀어헤쳐 펼쳐내고 다시 엮어야할 관계망, 그 흔적들이다. ‘드로잉’의 단위를 이루는 여러 굵기의 검은 촉수들은 캔버스를 넘어 벽이나 가벽을 향해 확장된다. 어떤 공간 속에 위치함으로서 생겨나는 불편함은 자신의 자리를 창출하려는 구체적 몸짓이 된다. 추상적인 좌표계 속의 점들이 만들어내는 압박은 바깥에서 물고 온 재료들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새의 둥지 같은 선적 흐름에 의해 무화된다. 그림자 같은 검은 실루엣은 중첩된 덩어리로 물질성을 확보한다. 그것은 자신을 중심에 놓는 유아독존식 존재의 증명이 아니다. 라인 테이프들 사이의 시공간적 간격들은 시각으로부터 몸으로,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열리는 트임이 있다.

 

출전: 2012 아르코 신진작가 워크숍(아르코 미술관)


unc 갤러리 2인전

 

인간의 체온은 보통 36.5도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 전시의 주제는 37.2도다. 육체의 교감이 절정(오르가즘)에 다다른 온도이며, 잉태를 위한 최적합의 온도이며,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는 순간의 온도라고 한다. 어찌 보면 불안감과 두려움, 긴장감과 절정과 같은 특별한 순간에 체온이 상승하는 것(혹은 정신이 고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듯싶다. 절정의 순간은 동시에 죽음의 순간이기도 하다. 오르가즘을 작은 죽음이라고 부른 조르주 바타이유의 말은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생리적 현상으로서의 불안감과 두려움, 욕망의 한 형태로서의 긴장감과 절정(나는 짜릿한 긴장감과 절정을 맞보고 싶다)은 죽음에 이르는(혹은 이르게 하는) 병이다. 그리고 그 병은 모든 거듭남의 계기들이나 정화의식의 계기들과 통한다(나는 새로 태어나고 싶고, 갱신되고 싶다). 불안감과 두려움은 성(죽음)과 속(욕망)을 매개시켜주는 계기란 점에서 신이 인간에게 심어준 신성의 지표다(신의 편재성). 그런 만큼 37.2도는 단순한 육체의 온도라기보다는 정신의 온도다. 육체의 교감과 진정한 소통(정신적 교감)은 하나다.

 

이주형은 포자를 그리고, 전윤정은 어둠을 그린다(엄밀하게는 캔버스에 라인테이프를 붙여 형태를 축조한다). 포자는 자가 분열하고 자가 증식하는 생명의 최소단위로서, 타자를 필요로 하지도 전제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특이한 생리구조를 예시해준다(이에 반해 주체는 언제나 타자를 전제로 한 개념으로서, 인간은 주체만큼이나 타자로부터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어둠 역시 포자처럼 자가 분열하고 자가 증식할지도 모른다(나는 내 속에 자라나는 어둠을 인식하지도 치유하지도 못한다. 어쩌면 어둠에의 인식은 사실은 그저 막연한 느낌에 지나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처럼 자가 분열하고 자가 증식하는 것으로 털이 있고 머리카락이 있다. 이주형의 그림은 털뭉치 처럼 보이고 전윤정의 그림은 머리카락다발처럼 보인다. 내 속에서 증식하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유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내 속의 타자이며, 내가 대면하고 있는 어둠이며, 트라우마(존재론적 상처)이며, 리비도(욕망)이며, 괴물일지도 모른다. 37.2도는 바로 이 내 속의 타자와 진정한 소통과 화해를 이뤄내는(어찌 보면 불가능한 기획일지도 모를) 순간의 온도다.


전윤정의 최근 작업은 검정색 공업용 종이테이프를 0.1에서 0.3mm로 잘라서 붙인 형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선이 붙여지고 집적되어 형태와 공간을 구축하는 작업은 일종의 드로잉이라는 점에서, 2000년대 초반에 몰두했던 펜 드로잉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전의 펜 드로잉이 유기체 형상으로 변모하곤 하는 무의식의 자동기술에 해당된다면, 2007년 이후 테이프로 붙이는 작업들은 붓이나 펜의 자연스러운 흐름과는 거리가 있다. 머리카락 같은 가는 선들로 이루어진 펜 드로잉은 그림 및 필기의 습관이 있기 때문에 손의 자연스러운 연장일 수 있다. 반면 테이프로 형상을 만드는 과정은 부자연스럽고 이물감이 있다. 잘라서 붙이는 선들은 결코 누에나 거미의 분비물 같은 자연스러움을 가질 수 없다. 더구나 작업의 스케일이 점점 커져가면서 작품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지 않으면 밀도 있는 작업이 나올 수 없게 되었고, 작품에 몰입하거나 완성을 위한 노동 강도는 더욱 세졌다. 이전처럼 손으로 끄적거리는 스타일이 아니라, 온 몸으로 그리는 지경이 된다. 물론 지금도 드로잉은 틈틈이 하고 있으며, 이러한 드로잉 작업들이 테이프 작업의 바탕이 되어주기는 한다. 펜 드로잉처럼 미리 계획하지 않는 즉흥성이 있지만, 테이프 작업은 좀 더 분절적이다.

 

하얀 바탕에 검은 라인 테이프로 붙여가면서 구축하는 형상들은 기본적으로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잉크로 글을 쓰고 선을 긋는 것과 유사하지만, 선과 선, 선과 형태, 형태와 형태 사이의 불연속성과 간극은 더욱 커진다. 테이프 작업에서의 선은 그리기이면서 지우기이고, 채우기이면서 쌓기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는 펜 드로잉 작업에서 종종 보이는 머리카락, 알, 씨앗 같은 미시적 차원의 유기적 이미지 대신에, 숲, 하늘, 바람 같은 차원의 자연이 등장하면서, 고물고물한 섬세함 보다는 역동성이 두드러진다. 크지 않은 캔버스에 테이프로 작업한 경우에도, 2008년 작품 [gloom]이나 [put opposite]처럼, 한두 개의 덩어리가 등장하는 식의, 강렬하면서도 단출한 표현방식이 특징적이다. 그것은 무엇인가의 묘사이기 보다는 감정의 응어리 같은 것처럼 보이는데, 수많은 결들로 이루어진 이 응결 물은 또 다른 상태로 변모하기 위해 한쪽부터 풀려 나가는 중이다. 미시적 생물체로 이미지로 가득했던 화면은 이제 실제 공간 차원으로 확장되어 그 내부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현미경 아래의 숨겨진 차원을 엿보게 하기 보다는, 또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창문이나 문을 활짝 열어 제친 듯 전윤정의 작품 변화는 획기적이다.

 

그것은 억압되어 있거나 은폐된 개인감정이나 심리적 차원을 노출(재현, 표현)하는 차원에 한정된 작업을 넘어선다. 이러한 변화는 외진 장소에 있는 스튜디오라는 작업 환경의 변화와 함께 일어났다. 밤과 낮이 바뀐 생활 속에서 어둠 속에서 응시된 사물은 그림자나 실루엣으로 감지되는 것이다. 객관적인 대상이랄 수도, 주관적인 환상이라 할 수도 없는 이 모호한 검은 실체들을 검정 종이테이프를 이용한 직선이나 곡선, 연속되거나 단절된 선 등으로 표현된다. 테이프의 선은 다양한 너비 뿐 아니라 두께를 가지고 공간으로 확장된다. 낮에 보면 표면을 도포한 먹색의 형상으로 보이지만, 밤에 조명을 켜고 보면 틈새의 바인더가 드러나 물성이 강조된다. 조건에 따라 회화 같은 환영과 부조 같은 물성이 동시에 감지된다. 라인 테이프는 통상적으로 원근법적인 환영을 이용하여 기하학적인 공간을 연출하는데 사용되곤 하지만, 전윤정의 경우 자신의 감정의 기복에 따라 형상이 결정되는데 대개 비형상적이다. 흰 바탕에 검은 테이프, 때로는 검은 바탕에 검은 테이프로 이루어지는 작품은 구상적인 단서들이 별로 없다. 작품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 없이 수많은 층을 가지며 흰 공간을 뒤덮는 가는 선들로 이루어진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작품 [black rainbow]에 대해, 작가는 ‘드러나지 않는 희망’을 표현했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에 비해 흰 공간 부분이 적고 검은 선들은 이리저리 이어져 있기는 하나, 파편적--어떤 전체의 부분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이다. 뭔가를 보듬어 안는 희망이라기보다는 갈기갈기 찢겨진 비극적이고 암울한 상황, 결코 순조롭게 이어질 것 같지 않은 너덜거리는 외곽선들로 가득하다. 수많은 텍스추어를 가지는 블랙 형태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배경이라기보다는 텅 빈 공간이다. 캔버스는 젯소로 밑칠 작업만 하기에 블랙과 화이트는 생경하게 대비된다. 음과 양은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서로의 이질성으로 겉돌면서 불편하게 공존한다. 서로에게 동화되기 보다는 자신의 이질성을 보유하기에, 화면은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 흰 것은 더욱 희게, 검은 것은 더욱 검게 보인다. 가는 선들의 집적으로 이루어진 무정형의 형태는 긴장감으로 충전된다. 검은 막들은 배경이라는 어떤 지지대도 없이 서로를 지지해 줄 동류를 찾아 촉수를 뻗는다. 테이프로 된 드로잉은 ‘중첩된 면을 만들고 공간을 감싸고 보호막을 치며 여러 겹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벽이나 캔버스를 뒤덮는다.

 

이런저런 충동과 욕망으로 충전된 몸의 궤적들은 몸의 확장으로서의 공간을 생각하게 한다. 캔버스에 테이프 드로잉을 한 작품 [무제]는 검은 마룻바닥 같은, 내부로 들어가는 공간감이 있다. 전시 공간의 벽 모서리를 이용한 작품 [상이한 감정] 또한 그러하다. 위에서 죽죽 내려오는 선들이나 아래에서 올라가는 선들이 교차는 중력의 느낌이나 가상적인 공간감을 형성하지만, 기하학적인 스케일로 조정된 원근법적 공간이 아니다. 작가가 요즘 표현하고 있는 ‘밤, 바다, 심연’처럼 밑도 끝도 없는 시공간이다. 물리적인 벽이나 생물학적인 막이 연상되는 다양한 두께와 외곽선을 가진 검은 형상들은 물질이나 몸의 산물이다. 전윤정은 몸을 써서 무엇인가를 쓴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연원한 선들이 만나면서 몸과 작품은 모두 텍스트가 된다. 작품이나 몸은 수동적인 물질이나 능동적인 주체라는 본질을 가지기 보다는, 무한한 결을 가지는 상호적 텍스트로 열려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물질과 몸은 대상과 주체 간에 설정된 이상적인 거리감을 확보하고 있지 않다. 전윤정의 작품에서 양자는 명료하게 재현되지 않는다. 형상들은 조형적으로 조율되기는 하지만, 체계적인 매개성(원근법이나 구조적인 균형 등) 보다는 몸에서 직접 짜낸 듯 날 것의 느낌이 강하다. 날 것의 생경함은 전윤정의 작품이 발산하는 주요한 감성이다. 물질은 대상화되기를 거부하고, 몸은 주체가 되기를 거부한다. 작업 과정은 결코 누군가와 공유할 수 없는 단일한 사건이 된다.

 

주체와 대상 사이에 설정된 이상적 거리가 사라지는 현상은 캔버스를 넘어서 실제 공간을 향하게 했다. 작품이 커지는 것은 물론이고 캔버스 대신에 나무판 위에 작업을 한다든가, 작품 자체를 가벽으로 삼아서 공간을 연출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자신의 방 안에 들어가듯이 작품 안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몸 내부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차원에서는 안팎의 구별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각도와 방향을 달리하며 펼쳐지는 끝없는 표면들을 조우하게 될 뿐이며, 면들은 어느 지점에서인가 뫼비우스 띠처럼 겹쳐진다. 타인들과의 갈등 때문에 철저히 외부와 차단된 채 자신 만의 공간을 일구자 싶어 했던 자폐적인 몸짓은 내부 공간을 무한히 주름잡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외부와의 접촉면을 마련한다.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표면에서 안은 곧 밖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방은 또 다른 세상과 통하는 미지의 장소가 된다. 그렇게 단절은 또 다른 열림을 위한 매개지대가 되며, 이는 예술가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고전적인 방식이기도 했다. 모호하면서도 힘찬 형태들은 마치 심리 테스트 잉크처럼 펼쳐지면서 관객의 상상력을 능동적으로 일깨운다.

 

출전 | 금호 창작 스튜디오 입주작가 워크샵


전윤정의 2000년대 중반 작품은 노트 모서리에 아무 생각 없이 죽죽 그은 낙서 같은 드로잉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처 없이 그어진 선들을 통해 갈등과 권태, 무의식 등이 전사되었다. 그러나 종이와 펜만으로 그려진 이러한 드로잉들에 대해, 한 전시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비슷한 부류의 작품을 많이 보고 자극을 받았다고 함--캔버스 위에 검정 라인 테이프로 드로잉 하는 스타일로 변화한다. 작가에 의하면 라인 테이프 드로잉은 펜 드로잉에 비해 감정 표현이 더 절제된다고 한다. 그것은 필기도구에 비해 쓰기가 매우 불편하다. 0.2mm 되는 가는 테이프를 잘라 붙인다. 겹겹이 붙인 테이프는 도톰하게 올라가면서 시각적인 환영을 넘어 물성을 획득한다. 캔버스 틀 안에서만 쌓은 것을 넘어서 확장된 공간으로 나아가서, 공간에 직접 선을 쌓아 붙이기도 한다. 쌓으면서 발생하는 물질적, 육체적 에너지는 시각적인 환영을 넘어선다. 이렇게 완성되는 벽화들은 평면 위가 아니라, ‘직접 벽에 들어가는 작업하는 느낌’을 준다. 연극적으로 연출된 공간은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개인의 방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심리적이며 육체적인 공간이다.

 

가늘게 그어진 펜 드로잉은 떨어진 머리카락 같은 느낌을 주듯이, 라인 테이프 드로잉 역시 어떤 육체적 단편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휙 지나가면서 본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 같은 실루엣을 가지고 있다. 차에 여러 번 치인 야생동물의 사체 같은 불길한 검은 파편이 떠오른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파편이란 죽음을 연상시킨다. 전윤정의 검은 형상들은 심리적이며 육체적인 단편들이다. 명확한 형태와 생동감 있는 색채를 포기함으로서, 죽음과 분열의 이미지가 압도한다. 이 드로잉은 구상이 아니듯이 추상도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매우 구체적이라고 한다. 그것은 주체나 객체의 반영이나 재현, 표현은 물론이고, 추상도 아닌 것이다. 이 작품들에서 파편은 사회, 역사, 주체라는 전체의 일부로 자리 매김 되지 않는다. 전윤정은 ‘나를 표현 한다’는 것이 지리멸렬하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감정 표현에 집착하는 나를 거부’하면서 양식을 바꾸어 나갔다. ‘작가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이 대목에서, 관념적인 의미의 ‘나’--요컨대 인간이나 예술가를 포괄하는 주체의 개념이나 그 연장선상에 있는 휴머니즘의 문화--는 사라지고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불분명한 가운데 다가오는 모호하지만 강렬한 경험만이 남게 된다.

 

라인 테이프 작업은 펜 드로잉에 비해 환영보다는 실제 공간에서의 연출이 더 중시된다. 폐허에 홀로 선자가 느낄 법한 이러한 현존의 체험은 현재 고립된 공간에서 작업하는 생활과 관련되어 있다. 옛날에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작품의 내용이었는데, 지금은 고립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산 속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밤과 낮이 뒤바뀌는 생활 속에서 발견한 이미지들이 라인 테이프 드로잉으로 되살려진다. 전윤정은 진짜 밤하늘은 하얗고 말한다. 캔버스의 하얀 바탕이든, 하얀 벽이든 작품 속 화이트는 완전히 전도된 사고방식에서 태어난 무한 공간이다. 이 밑도 끝도 없는 공간 속에서 어둠이나 그림자들이 척척 겹쳐지는 듯한 이미지가 탄생했다. 여기에서는 어둠이나 그림자 같은 네가티브 공간이 더욱 활성화 되었다. 그것은 강렬한 감정의 상태이며 물질의 원초적인 상태이기도 하다. 바깥의 공간에서 작업하는 전윤정의 작품은 고립을 통해 비로소 타자와 가능해진 소통이라는 예술의 본원적 존재 방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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